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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는 이야기

내가 노무현에게 연민을 느낀 세가지 이유


1997년도 겨울, 난 김대중을 반대했었다.
평생을 대통령만 보고 오신 분인데, 주변에 얼마나 신세를 졌겠는가,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사방에 신세를 갚다가 끝날 것이다.

그 당시, 난 김대중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난 김대중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별반 의미를 두지 않았다.

되려, '전라도' 출신의 택시 운전기사분들이, '슨상님'이라며 극구 칭송을 하는 모습에대한 반감이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솔직히, 지금도 카드 대란의 책임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있다는 생각이 있다.
2002년도 겨울, 난 노무현을 반대했었다.
정몽준이랑 단일화를 한 다음, 뒤통수를 쳤다.
역시 정치인이라서 말을 바꾸는데 선수인가 보다.
근데, 뉘신가?
 어떤 식으로 단일화를 했는지, 단일화가 깨진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들어보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난 노무현에 대해서도 별반 의미를 크게 두지 않았었다.

그리고, 이라크 파병의 소식에, '그럼 그렇지, 지가 별 수 있나'의 냉소를 보냈고...

김선일씨 사망 소식에, '너희들이 이 나라를 책임지는 자들이라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며 분노를 했었다.


이 두 대통령이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차이는,
한 사람은 한명의 정치가였다면, 한 사람은 '연민을 느끼는 안타까운' 정치가라는 차이였다.


첫번째 연민의 이유.
전두환/노태우/김영삼을 관통하여 배운 '사회' 과목에서 내려진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을 기본으로 하고,
소수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며,
내려진 결정을 지지하지 않았다 해도 따라야 한다.
그것이 다수의 의견이기 때문이다.
법과 원칙을 기준으로 노조를 까고, 학생 운동을 비난 하던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당선된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닐때,

사회의 불합리성에 가뜩이나 신물을 느끼던 젊은이가 느끼는 첫번째 인식이 무엇이었다 생각하는가?

위선(僞善; hy·poc·ri·sy)
[명사] 겉으로만 착한 체함. 또는 그런 짓이나 일.

그렇다, 저들에게 법과 원칙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가져다 쓰는 방패일 뿐이니, 자기들에게 불리할 때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것이 법과 원칙이었다.

난, 그런 그들에게 분노를 했고, 그런 자들에게 눌리는 '힘없는' 대통령에게 연민을 느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냉소를 보내기도 했다. "등x 같으니, 저런 놈들을 내버려둬? 조금만 파봐라, 고구마 줄기 처럼 주렁주렁 달려나올텐데, 그럼 싹~ 쓸어버리고 새판 짤 수 있을거 아냐! 지도 구려서 내버려두는거 아니야?").

예술성이라고는 전혀 보이지도 않던 그 추잡하고 비천한 연극(이라고 쓰고 '헛지랄'이라고 읽는다.)까지 자랑스럽게 한판 하시더니, (도대체, 시간은 왜들 그리 남아도시는지?)

결국, 내 눈으로 보기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이유를 들어 그를 '탄핵'하기에 이른다.
헌정 사상 최초!
(아무튼 뭐든지 최초, 1등, 원조 이딴거 너무 좋아해.)
난, 저렇게까지 구박을 받는 대통령을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나라에서 이런 대통령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그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그는, 이 나라의 주류들에게 임기 중 단 한번이라도 대통령으로 인정받은 적이 있었을까?
이것이 내가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첫번째 이유였다.


두번째 연민의 이유.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되고 난 후,
처음에는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들떠서 난리를 치던 야바위꾼들이, 국민들이 하나 둘 촛불을 켜고 거리로 나오자, 쥐새끼 처럼 오글오글 거리며 쥐구멍에 숨었었다.

결국, 탄핵은 그들에게 역풍이 되었고, 노무현에게는 위기가 기회로 전환되는 드라마가 펼쳐졌다.

그러면, 뭘 하나, '노인네는 투표하지 말아라'라는 유명한 노인 투표 무용론을 시작으로, 나오는 열우당의 강한 헛발질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여당의 헛발질이 대통령의 지지도를 깎아 먹는 것이야 어찌보면 당연지사.
하지만, 내가 노무현에게 연민을 느낀 이유는 이 당연한 사건이 그다지 당연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여당이라고 엉덩이를 비집고 온 그들은 명색은 여당이되,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가장 열심히 딴지를 거는 듯 싶었다. (최소한 도움이 되는 측의 여당은 아니었다. 저들은 단체로 X맨이었다.)

그들은, 여당의 탈을 쓰고 노무현에게서 국민들의 마음을 떠나보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공유하는 인물들이 과연 있었을까?
저 많은 '정치쟁이' 들 중에 진정 그와 함께 걸어갈 만한 '정치가'가 있었을까?
소외와 상실의 시대, 누구나 외롭겠지만, 내가 보던 대통령은 정말 너무나 외로워 보였다.
그것이 내가 그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 두번째 이유가 되었다.


세번째 연민의 이유.
대부분의 어른들이 그렇듯, 우리 집도 X선 일보가 들어온다.
우리 아버지는 장교 출신의 X선 일보 애독자시다.

다른 신문에 비해서 페이지도 많고, 내용이 실하다는 것이 우리 아버지의 주장이다.

개인적으로 이 신문,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로 멀리하던 나로서는 아버지와 이딴 폐휴지때문에 싸움이 발생하는 것이 싫어 이래저래 그냥 지낸지 벌써 10년이 된 시점이었다.

중간 중간 무슨 사건들이 있을 때 마다,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해괴한 '카더라' 통신이 아버지를 통해 들렸다.
혹은 진실은 진실이되 반쪽짜리 진실이 들려왔다.

난 이게 우리 집만의 독특한 상황극이라  간주했었다.

그래서, 반쪽짜리 진실의 나머지 반쪽을 채워드리거나,
'카더라' 통신에 대한 '아니더라' 기사를 가져다 올바른 정보로 아버지의 기억을 갱신시켜드리곤 했다.

그리고, 점점더 특정 신문사들에 대해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국민이 국가의 주인으로서 그 권리와 의무를 행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뽑으라면 난 망설임 없이, 올바른 언론을 뽑는다.

권력은 부패할 수 있다.
사람도 부패할 수 있다.
아니, 사람이기에 부패하고, 부정을 저지른다.

오로지, 그러한 부패, 부정을 타파하고 정화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언론이 필요할 뿐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자정기능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언론은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언론사라 하더라도, 결국 사람의 일이기에, '완벽한 객관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사실을 보도할 것 (절반만 보여주고, 나머지는 숨기고 그런거 없다.)
  2. 취재 기사의 경우, 주관적 시점으로 재편집하여, 원래의 의도를 왜곡하지 말 것.
  3. 자신들의 기존 보도/기사/주장을 번복하게 될 경우, 번복하게 되는 것을 알리고, 번복의 사유를 명시할 것.
  4. 균형 잡힌 시점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할 것.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그것은 언론사가 아니다.

나의 기준에서, 저들은 언론사라 칭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마치, 양복을 만들기 위해 바늘도 있고, 실도 있고, 가위도 있는데, 옷감이 없는 것 같은.
마치, 축구 경기를 위해, 경기장도 있고, 관중도 있고, 선수도 있고, 심판도 있는데, 공이 없는 것 같은.
마치, 밥을 짓기 위해, 밥통도 있고, 물도 있고, 전기도 있는데, 쌀이 없는 것 같은.

그렇다, 나의 기준에서, 저들은 언론사로서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빠져있다.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사실로 포장하여 보도하였지,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과 대척점에 노무현이 서있었다.
(저들만 문제였는가?)

날을 세운, 악의가 느껴지던 서슬퍼런 펜들의 난잡스러운 휘갈김 속에서,
그는, 우직스럽게 '원칙대로' 일을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정작 그의 '원칙대로'라는 방침은 한국 내의 어느 쪽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결국,

100%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만으로,
대학을 못나왔다고, (나와서 뭐가 그리 다르던가? 되려 더 비천한 인간들도 있지 않던가?)
돈이 없다고, (있으면 더 고귀해지던가? 돈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만큼 천해진 사회를 욕하지 않고?)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다고, (너희들이 원했던 세상은 있는자가 그 힘을 휘두르지 않는 세상이 아니었는가?)
기득권이 아니라고, (비주류에게는 시기(?), 주류에게는 견제(?), 그는 왜 3자 취급받았어야 했는가?)

어느 누구도 그를 안아주지 않았고,
그는 그렇게 삯풍이 휘몰아치는 차디찬 냉소 속에 버려져있었다.

그는, 그렇게 모든 이들에게 버림을 받아 마땅했는가? 그렇다면 뽑은 X들은 뭔가?
이것이 내가 그에게 연민을 품게된 세번째 이유였다.



그렇다.
난 노무현을 지지했던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가 가는 길에 박수를 친적 없고,
지지한다고 환호한적 없고,
그 잘 나간다던 '아방궁'을 찾아가본 적도 없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되새겨 보거나, '옳거니' 하면서 무릎을 친적도 없었다.

하지만,
상식선에서 동의하는 부분을 억지로 왜곡하여 욕하지 않았고,
그가 하려는 일이 나라에 보탬이 되는 것이었으면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내 가치관에 부합되지 않는 정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갖기는 했지만,
최소한, 그 부정적인 입장이 노무현 개인을 능욕하는 인신 공격 등으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대통령을 욕하는 것은 쉽다.쉬웠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격을 떨구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게 그렇게 어려운가?)



그리고, 그의 육신이 천길 낭떨어지로 던져진 그 때,

난, 노무현을 상실했다는 것을 슬퍼하지 않았다.
우리 시대의 상식이 사망했다는 것을 슬퍼했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사회복지가 끝내주고, 관용이 넘치는 나라다.
단 돈 29만원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복지 끝내주는 나라이며,
나라를 IMF 구제 신청을 받게끔 부도를 내놓고도, 아무도 책임질 필요 없는 관용이 넘치는 나라다.

우리 나라 대한민국은,
광기로 가득차고, 냉소가 넘치는 나라다.
퇴임하는, 이제 권력을 내려놓고 한 국민으로 되돌아오는 이에게,
옷깃을 물어뜯으려 난리를 치던 광기에 환호하고,
'그럴 줄 알았다, 너라고 별 수 있더냐'라는 냉소들이, 채면을 아는 이의 주먹에서 힘을 빼앗는,

그렇게 부패에 넌더리를 내는 치들이,
'부패해도 능력이면 OK'라며 전과 14범을 수장으로 뽑고,
독재자의 딸이 차기 대통령이라며 활개를 치고 다니는가?


상식이 통하던 시대,
이제 우리에게 그 시대의 상식은 종언을 고했다.


지금 우리에게 상식이란,

있는 자는 더 가져야 하고,
없는 자는 더 없어야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요.
유권무죄 무권유죄요,
살아 있는 권력에 무릎을 꿇는 것이 정의요,
죽은 권력을 짓밟는 것이 정의다.


난, 그래서, 1년 전 사망한 '그 시대'의 상식이 너무나도 그립다.


이제, 대한민국은 없다.
대(大)와 민(民)이 없고, 한국만 있다.